영성노트
​타협
2018-10-04

타협

 

9월 30일 주일설교

타협에서 오직 신앙으로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이었지만 나에게는 거대한 의문 하나를 남겼다.

 

“왜 타협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런 질문은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허나 가끔은 적당히 타협하며 COMMON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 나한테는 자연스레 나오는 질문이 아니었을까?

 

아브라함은 타협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의 신분을 잃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도는 응답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산을 엄청난게 늘어났다.

 

이제 뭔가 타협이 달콤해 보이지 않는가?

 

타협을 해도 하지 않아도 나의 길을 축복이라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그렇다면 왜 타협을 하지 말아야 할까?

 

물론 더 높은 수준을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한다.

허나 그 이야기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도전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현재 이 수준에 만족해”

“나는 지금의 축복에 만족해”

“더 높은 수준은 특별한 이들을 위한 것이야 나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하나님께 감사해”

 

부끄럽지만 얼마 전에 나의 생각과 동일하다.

 

아브라함은 모든 민족을 축복하기 위해 부름받았다.

 

창세기 12장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허나 그랄 땅=블레셋의 땅=아비멜렉의 땅에서 일어난 일은 정 반대 였다.

 

아비멜렉과 그 백성들은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닌 오히려 이 지구상에서 없어질 뻔 하였다.

민족 전체가 멸절할 위험에 처했다.

고의로 저지른 죄로 인해서가 아니다.

 

(부지 중에 지은 죄도 죄이다. 아비멜렉이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 일을 하였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온전한 마음만 인정하셨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거리가 멀다.

타협을 하니 아브라함은 상관없었지만 다른 민족 하나가 아니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이니 자신의 아들 중 하나가 죽을 뻔 하였다.

타협을 자신을 위해서 하지 않는 것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타협은 남을 위해서 하지 않는 것이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다가 타협을 했다면 인류는 멸절했다.

라합이 타협을 했다면 다윗은 태어날 수 없었다.

룻이 타협을 했다면 그리스도는 태어날 수 없었다.

바울이 타협을 했다면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골고다 언덕에서 타협을 하셨다면 인류에게는 그 어떠한 소망도 존재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을 것이다.

즉 예수님을 온전히 우리를 위해 타협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셨다.

 

오늘 내가 나의 세상적인 것과 타협을 하면 누군가는 죽는다.

그것은 확실하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선지자의 직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 내가 타협하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죽음에서 건져 올려진다. 사망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로 옮겨진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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